당시 남한에 있던 남로당 간첩에 의한 것이 맞나요?https://youtu.be/a_jZv1qQCtg?si=UjyAL2xh_BEN4nzb
해당 김대중의 발언은 1998년 11월 23일 CNN 인터뷰에서 밝힌 자신의 '사견(私見)'일 뿐입니다. 2003년 12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출간한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에서는 4/3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제주 4/3 사건의 시작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과 제주도 도민들의 무장봉기가 아니라, 1947년 3월 1일 제주경찰서 앞에서 경찰이 미군정장관 아처 러치(Archer Lerch) 소장을 호송하다가 도민 6명을 집단 사살해버리며 시작했다고 공식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항의하는 제주도 도민들을 경찰과 서북청년회가 납치, 테러, 체포, 고문하는 것을 일삼자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을 필두로 남한 정부와 미군정에 저항에 나섰다가 이승만 정부의 대량 학살에 피해 입은 일반 도민까지 무장대에 합세했던 겁니다. 즉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이나 북한 간첩이 아니라, 미군정과 남한 경찰 때문에 일어난 겁니다.
이때 봉기와 항쟁을 이끌었던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의 원래 전신은 '조선공산당'으로, 일제강점기에 해산했으나 해방 직후 1945년 8월 20일~9월 11일 박헌영 주도로 재건했습니다. 이때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으로부터 합법 정당으로 인정받고, 폭력 혁명론이나 무장봉기 전략이 아니라 '평화 혁명론'과 '민주적 선거' 전략에 따라 미군정에 협조하며 신생 독립국의 개국을 준비했습니다. 이 시기 박헌영 발언과 조선공산당 강령을 보면 "극좌 반대" "부르주아 민주주의" "소련 경계 독립" 등을 의제로 내세웠습니다. 해방 직후 한반도에는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세운 다당제 민주공화국 '조선인민공화국'과 지방 자치 행정 기관들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은 한반도 주민들에게 압도적으로 지지받고 있었으나, 이를 북한의 소련군과 남한의 미군이 북위 38선을 따라 분할 점령하고 군정을 펼치는 바람에 제대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결국 1946년 2월 16일 사라져버렸습니다.
한편 당시 남한은 일본 조선총독부가 철수하기 전 대량 발행한 화폐 때문에 물가 폭등이 심했고, 이 화폐들을 11월 2일 미군정이 그대로 인정하고 유통하는 바람에 식량난까지 겹쳐 민심이 나쁘고 사회가 혼란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여기서 1945년 12월~1946년 1월, 이승만이 대표로 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원이 위조지폐를 찍어내려다 이 사실이 미군정과 남한 경찰에 발각됐습니다. 이에 미군정과 남한 경찰은 관련자들을 고문 수사해 허위 진술을 받아낸 후, 위조지폐의 규모를 과장하고 책임자를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전체로 조작해 남한 물가 폭등과 식량난에 따른 민심 악화와 사회 혼란의 책임을 전부 조선공산당에 전가해버렸습니다. 이른바 1946년 5월 15일 "공산당이 남한 사회를 혼란시키려 범죄를 저질렀다"라며 미군정이 발표했던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실제로는 조선공산당과 무관한 사건을 미군정과 남한 경찰이 조작한 사건입니다.
이를 계기로 1946년 9월 7일 미군정과 남한 경찰은 공산당 활동을 불법화하고 박헌영에 체포령을 내리는 등 본격적으로 공권력으로 공산당과 좌익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9/23 부산총파업과 10/1 대구역 집단 사살을 계기로 남한 전역에서 경상도를 중심으로 좌익 주도하에 미군정에 대항하는 민중 봉기가 벌어졌습니다. 미군정은 10월 2일 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한 좌익 민중 봉기를 11월 4일까지 강경하게 진압했습니다. 이에 박헌영 등 공산당 간부와 활동가들은 남한에서 잠적하거나 월북했고, 이때부터 조선공산당도 그동안 미군정에 협조하며 활동하던 온건 좌익 노선을 버리고, 합법적인 활동 공간을 허용하지 않고 자신들을 탄압하는 미군정과 남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11월 23일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개편하고 폭력 테러 지하 활동과 빨치산 야산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이때 황해남도 배천(이북5도 행정상으로는 황해도 연백)에서는 7월 1일 미군과 소련군 간에 교전이 벌어지며 38선에서 최초 교전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1947년은 미국 트루먼 외교 방침으로 국제 사회에서는 본격적으로 미소 냉전 대립이 심해지고, 이에 따라 남한에서도 좌우익 간 이념 갈등이 본격적으로 심해지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 남한에서는 좌익이 3월총파업을 벌이며 미군정에 '노동자 생활 보장'이라도 요구했고, 민주정 통일 정부를 세우려는 미소공동위원회가 끝내 결렬했으며, 그나마 미군정에 협조하며 분단을 막으려는 중도파 인사 여운형과 장덕수가 피살하는 등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개성(이북5도 행정상으로는 경기도 장단)에서는 3월 18일 남한 경찰이 소련군 2명을 사살하며 38선에서 최초 유혈 살상이 일어났고, 이를 시작으로 38선 일대에서 [남한 vs. 소련군] [북한 vs. 미군] 양상으로 무력 충돌과 분쟁이 빈번해지는 시기였습니다. 제주 4/3 사건을 촉발한 삼일절 제주경찰서 앞 집단 사살은 이런 정국과 분위기 속에서 벌어졌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제주도에서도 도민들의 반발과 경찰의 탄압, 좌익 남로당과 우익 서북청년회 간 이념 갈등도 심해지며 무력 충돌과 인명 피해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1948년, 한반도 통일 정부를 세우려는 UN 선거 위원단이 한반도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선거를 거부하자, 미국을 필두로 UN은 남한에서라도 단독 정부를 세우는 총선거를 치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2월 7일~5월 8일 남한 전역에서 좌익이 주도하고 우익도 일부 참여하는 2월총파업과 5월총파업이 벌어져 단독 선거와 대한민국 개국을 막으려 했습니다. 이처럼 국제 사회와 열강 때문에 남한 단독 선거와 개국이 가시화하는 시기에 좌우익 갈등이 심해지던 제주도에서도 4월 3일, 남로당 도당 지도부가 중앙당과 협의하지도 않고 독단으로 '남한 단독 선거, 단독 정부 반대' '조선인민공화국 지지'를 외치며 미군정과 남한 정부에 대항해 도민을 이끌고 무장봉기에 나섰던 겁니다. 그러나 이미 확고해진 국제 정세와 남한 정국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4월 28일~5월 5일 제주도 무장대와 육군 경비대 간에 협상을 통해 극적으로 맺었던 평화로운 수습 대책마저 미군정과 남한 경찰이 무산시키고 토벌 소탕 작전을 준비했습니다. 남한에서는 5월 10일~8월 15일 총선거를 치르고 헌법을 공포하며 대한민국을 개국했고, 북한에서는 4월 27일~9월 9일 헌법을 승인하고 총선거를 치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개국했습니다. 이렇게 남북한에 각각 별개 국가가 들어서자, 북한은 5월 14일 남쪽으로 흐르는 전기를 끊으며 최초 대남 도발을 벌였고, 미군과 소련군도 한반도 문제에서 손 떼고 10월~1949년 6월 한반도에서 철수했습니다. 이즈음 남한의 좌익은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인 북한을 선택하고 지지하도록 내몰렸고, 박헌영도 월북했습니다.
한편, 1948년 10월 11일~11월 17일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통금령, 포고령, 계엄령을 내리며 한라산과 중산간 지역에 살고 있던 도민을 무장대로 간주해 대량 학살하는 초토화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전라남도 여수의 육군 14연대가 10월 19일 제주도 초토화 작전에 항명하고 전남 동부, 경남 서부, 전북 동남부의 좌익과 함께 지리산에서 빨치산을 형성해 이승만 정부에 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위기를 타개하고자 이승만 정부는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했고, 남한군은 1949년 1월 19일 황해남도 해주로 북파공작원을 침투시켜서 대북 도발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1949년 38선 일대에서 남한의 대북 공격은 "북진 통일"을 명분으로 남한이 주도하며 11월 15일까지 계속했습니다. 이를 빌미로 김일성은 북한 주민들을 남한과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주입하고 군사 훈련시켰으며, 소련 스탈린과 중국 마오쩌둥에게서 무기와 군사고문단을 지원받고 전면전을 일으키도록 승인받아 준비했습니다.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6/25 남침으로 한국전쟁을 전면전으로 키우자, 제주도 곳곳에서 체포 구속돼있던 도민들이 재판도 없이 집단 총살당했습니다. 그리고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군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남한군의 작전 통제권을 미군에 넘겼습니다. 이때부터 제주도에서는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을 도민들에게 개방할 때까지 미군의 작전 통제와 궁극적 책임 아래 이승만 정부의 남한 군경과 우익 청년 단체가 무장대를 토벌 소탕하고 도민을 대량 학살하는 군사 작전을 펼쳤고, 1957년 4월 2일 한라산에서 마지막 무장대가 붙잡히며 군사 작전이 끝났습니다. 그 결과, 1947년 3월 1일 제주경찰서 앞에서 시작하고 1957년 4월 2일 한라산에서 끝난 제주 4/3 사건의 사망자는 공식적으로는 3만 명으로 추산하나, 비공식적으로는 6~8만 명설까지 있습니다. 이 중 남한 정부의 군경과 우익 단체에 살해당한 도민의 비율은 전체 90%로, 좌익 무장대에 살해당한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결국, 제주 4/3 사건은 해방 직후 일제 식민지 체제의 문제점과 사회 모순을 개선·해결하고 신생 독립국을 세우려던 과정에서 미소 점령과 남북 분단을 맞이한 한인(Korean)들이 미군·소련군 군정과 이승만·김일성 극단주의 독재 정권에 저항했다가 국가폭력과 대량 학살로 좌절된 민중 봉기 중 하나입니다.
당시 우익이 우세했지만 소련이 점령했던 북한에서는 우익에 1945년 9월 3일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에서 현준혁이 살해당하는 걸로 시작해 9월 16일 황남 해주에서 공산당 간부 5명이 테러당하고, 평북에서 11월 18일 용천 용암포와 11월 23일 신의주에서 최초 민중 봉기가 일어나고,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 김일성이 살해당할 뻔하고, 3월 13일부터 벌어진 전국적인 대규모 반소반공 봉기로 절정을 이루고, 1950년 10월 13일 황해도 봉기로 이어지는 등 스탈린주의와 국가자본주의를 신생국 이념으로 정착시키려던 소련군정과 김일성 정부에 반발해 평안도·황해도·함경남도 도민들이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주도 아래 우익 민중 항쟁을 벌였고, 이는 1970년대 평안남도 개천 묘향산의 월봉산에서 마지막 우익 빨치산 '고진만'이 붙잡히면서 끝났습니다.
당시 좌익이 우세했지만 미군이 점령했던 남한에서는 1945년 12월 30일 서울에서 송진우가 살해당하는 걸로 시작해, 좌익에 1946년 9월 23일 부산과 10월 1일 '조선의 모스크바' 대구에서 최초 민중 봉기가 일어나고, 1947년 제주경찰서 앞 집단 사살, 3월총파업과 함께 여운형·장덕수가 살해당하고, 1948년 2월총파업, 4/3 제주도 봉기, 5월총파업, 10/19 여수 14연대 반란으로 이어지며 지리산 빨치산 투쟁에서 절정을 이루고,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살해당하고, 1952년 6월 25일 서울에서 이승만이 살해당할 뻔하는 등 냉전자유주의와 시장자본주의를 신생국 이념으로 정착시키려던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반발해 경상도·전라도·제주도 도민들이 박헌영의 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 주도 아래 좌익 민중 항쟁을 벌였고, 이는 1963년 11월 12일 경상남도 산청 지리산의 내원골에서 마지막 좌익 빨치산 '정순덕'이 붙잡히면서 끝났습니다.
올해는 2025년으로, 1945년 8월 28일 경성 용산의 일본제국 조선군관구사령부에서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북에서는 소련군 25군과, 이남에서는 미군 24군단과 정전 협정을 맺고 행정권을 넘기겠다"라고 공식 발표하며 '38선'의 존재와 미소 점령 계획이 한인들에게 처음 알려진 지 80년이나 지났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중심의 국가 주관적인 분단 역사관에서 벗어나서, 남북한뿐 아니라 미일중러를 포함한 국제 객관적인 통합 역사관을 확립한 채 해방 직후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의 역사를 바라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글을 계기로 제주 4/3 사건도 이제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셨으면 좋겠습니다.